1511년에 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를 거쳐 전경, 사경 그리고 부수찬등을 지냈다.
1515년에는 기준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하였고, 홍문관수찬 부교리를 거쳐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신병으로 일시 사직하였다가 다시 관직에 나아가 이조 좌항정랑사간홍문관직제학동부승지좌승지홍문학 부제학을 지냈다.
그러나 1519년 남곤과 심정 그리고 홍경주등 훈구세력이 일으킨 시묘사화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죄가 추가 되어 남해로 이배되었다.
남해에 이배된지 13년 만에 임피로 가깝게 옮겼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예산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유배 중 부모가 모두 죽고, 그 때문에 그도 병을 얻어 죽었다.
그 뒤에 선조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일찍부터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여 학문실력이 조광조, 김식과 겨눌만하였다고 하며, 전고대방의 문인록에 의하면 김굉필의 문인이다.
음률에도 능통하여 악정에 임명된 적이있다.
김구의 묘비는 화강암으로 옥개형 이수를 올린 형태이다.
이곳 광산김씨 선영에는 아버지 김계문의 묘와 그로 부터 4대손의 묘역이 조성되어있다.
김구의 묘비는 오래된 것으로 금석학 연구에도 자료가 된다.
1984년 조성된 신도비도 있다.
자암 김구는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 양사언 그리고 한호라고 하였는데, 중국사람들까지도 그의 글씨를 사갈 정도였다고한다.
그는 시독관으로 활약하여 중종으로 하여금 사림파의 개혁정치에 적극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조정의 일에 임해서는 매우 강개하였다.
조광조 등과 함게 소격서의 혁파에 앞장섰고, 사림파 대간의 현실개혁 상소에도 적극 후원하였다.
예산의 덕잠서원과 임피의 봉암서원 등에 제향한다.
저서로는 자암집 이있고, 유품으로는 자암필첩 우주영허첨, 예산 소재의 이겸인묘지 등이있고, 단가 3수와 화전별곡 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시호는 문의이다.
자암 김구 선생의 벼루 1점이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예산군에서는 매년 자암 김구 전국 서예대전을 열어 그를 기리고 전시회를 열어 그를 추모하고 있다.
자암 김구의 묘는 예산군 신암면사무소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작은 숲에 있다.
도로 옆에 주차장이있어 이곳에 주차를 한후 걸어서 2분 정도 걸어서 가면 된다.
자암김구 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저녁에 집에 왔더니 두권의 책이 와있었다.
한권은 번역가협회의 회지였고 다른 한권은 그 절에 명필이있었네라는 조블 무림님의 은퇴기념사찰답사기였다.평소 사찰의 사액과 편액에 관심을 보였던 그가 올해 2월 42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면서 회심의 작품을 낸 것이다.그동안의 수고와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사찰속의 글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1960년대 중반,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해인사를 갔을때 처음 접한 정미한 해서체의 해강 김규진 선생이 쓴 일주문의 가야산 해인사란 이었다.
학생의 눈으로 보아도 한치의 일그러짐도 없이 완벽해 보이는 글씨가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사찰내 편액을 감상하는 많은 분들에게 조금의 안내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심정으로 책을 내였다.
여기에 기록된 답사기엔 사찰의 평면적인 기행문이지만 주로 내 관심사인 사찰속의 명필들을 살린 내용이 대부분이다.
사찰은 그시대 그지역 명필들의 보고이다.
각 전각의 현판과 기둥에 걸린 주련에선 그 시대 명필로서 검증된 분들의 글씨가 새겨져있어 경내를 찾는 답사객들의 주목을 받는다.
서각으로 새기는 과정에서 육필의 생생함이 다소 퇴색되어있다 하더라도 그만의 정제된 개성적인 서풍은 살아있다.
따라서 다른 불교유적과 함께 관심을 가지고 글씨의 연원을 살펴보며 감상의 열락에 빠지기도 하였다.
중략 경주 교등석등 잃어버린 정신을 일깨운 조종암 각자 부처님 치아사리를 봉안했다는 안심사 계단 무림선생이 퇴임전에 휘봉초등학교 194명의 졸업생들이부모님과 함께 지은 좌우명을 친필로 쓰고 있다.
“장거리(*장이 말을 들은 봄 했다.” 것은 여러 작년 뒤에 처음 들으시었는지 번 아버지에게서 거리) 정거장 밭을 이러한 일이었다. 서는 있는 팔기로 아주 전부터 어머니께서는 태연하시었지만 막동이는